[두모악편지 2005/03/14] 여섯번째 편지

 

* 이전 홈페이지에 게시되었던 김영갑이 작성한 두모악편지입니다.

 

육신의 움직임이 둔해질수록 활동 반경이 좁아져 방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손의 움직임이 약해져 책장을 넘기거나 글을 쓸 수도 없다. 의자에 앉아 있기도 힘에 부친 날은 사람들과 만날 수도 없다. 혀가 꼬여서 어눌해진 발음 때문에 전화통화도 어렵다. 혼자 지내는 하루는 느리고, 지루하다. 일상은 단순하고, 탄력이 없다. 방안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침대에 누워 있는다. 눈을 뜨면 천정과 벽만 보인다. 장애를 가진 내 육신이 보인다. 눈을 감으면 지평선과 수평선이 보인다. 중산간 외딴집에서의 하루는 길었다. 찾는 이 없이 혼자 지내는 하루는 지루하고 더디 흘렀다. 특별한 소일거리가 없으면 심심하고 지루했다. 불평불만으로 가득 찼던 그 시절이 지금은 그립다. 온종일 침대에서 지내야 하는 지금은, 카메라를 메고 들녘을 쏘아 다니던 그때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깨닫는다. 앞을 보면 끝이 보이지 않는 수직 절벽이고, 뒤를 되돌아본다고 흘러간 세월을 어찌할 것인가, 좌우를 살펴도 방법이 없다. 민간요법에 매달려 보았지만 나에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은 하늘이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모든 생명은 하늘의 영향을 받는다. 하늘의 도움 없이는 잠시도 살지 못한다. 이젠 하늘만을 믿어야 한다. 오늘 내가 감당해야 할 시련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지만, 불평하지 않고 설레임으로 내일을 기다린다. 어제 하루가 고통스러웠듯, 오늘의 시련이 내일로 이어짐을 알기에 새날이 시작되어도 절망하지 않는다.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 따뜻한 봄을 만날 수 있다. 추위가 강할수록 따사로움은 돋보인다. 풀과 나무가 내게 길을 가르쳐 주었다. 나무는 열매에 집착하지 않는다. 풍성한 열매를 기뻐하지도 우쭐대지도 않는다. 열매는 사람, 곤충, 새들의 몫이다. 아낌없이 모두 나누어주고, 나무는 다시 새로운 꽃을 피우기 위해 왕성한 활동을 시작한다. 병을 치료할 방법이 없음을 알았을 때, 주저 없이 자신을 자연에 내맡겼다. 삶의 끝자락에 내몰린 나는 그렇게 하늘만을 믿고 나에게 허락된 하루를 감사하며 신명을 다해 오늘을 즐긴다. 온종일 깊은 생각에 잠겨 내 자신을 들여다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나만이 가진 것은 무엇일까. 그동안 보고, 느끼고,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 가만히 나를 들여다볼 뿐 무엇을 보려고, 느끼려고, 깨달으려고 하지 않는다. 남들에게도 강요하지 않는다. 보고 싶으면 보고, 느끼고 싶으면 느끼고, 깨닫고 싶으면 깨달으면 된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으면,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여행을 할 수 있어 좋다. 몸 따로 마음 따로, 의지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다. 이제는 흘러가는 대로 지켜볼 뿐이다. 나의 의지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그동안 보고 느끼고, 깨달았던 것들을 통해 자연의 질서, 생명의 순환원리, 대자연의 메시지를 나누는 것이다. 침대에 누워 지내는 동안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어서 편안하고 즐겁다. 두 눈으로 보았고, 두 귀로 들었고, 두 손으로 만져보고, 두 개의 콧구멍으로 맡아 보고, 온몸으로 느껴보았기에 확신했던 것들이 진짜배기가 아니라 허드레한 것이었음을 알았다. 20년 동안 오름 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도 모르면서 두 개, 세 개 욕심을 부렸다. 중산간 오름 모두를 이해하고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표현하겠다는 조급함에 허둥대었다. 침대에 누워 지내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 같은 과오를 범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