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너머의 꿈 - 오성희

오성희 (충무갤러리 큐레이터)

 

김영갑 사진전 _ 지평선 너머의 꿈

“흙으로 돌아갈 줄을 아는 생명은 자기 몫의 삶에 열심이다. 만 가지 생명이 씨줄로 날줄로 어우러진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다. 천국보다 아름다운 세상에 살면서도 사람들은 또 다른 이어도를 꿈꾸며 살아갈 것이다.” _ 김영갑

 

또 따른 이어도를 찾아 제주도의 바람이 된 사람

이어도. 눈에 보이지 않는 섬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바다에 나간 남편이나 아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이어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해산물이 풍부한 만큼 이어도에서 전생에 이루지 못한 영화로운 삶을 누리고 있을 꺼라 믿는 것이다. 이처럼 제주민들에게 이어도가 전설속의 낙원인 것처럼, 뭍사람인 고(故)김영갑에게 제주도는 이상향이었다. 그는 1985년 제주도에 정착해 2005년 루게릭병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20여 년 동안 제주도의 자연을 사진으로 담는데 생의 모든 열정과 영혼을 바쳤다. 김영갑의 사진세계는 월남에 다녀온 형이 선물한 카메라와의 인연으로 시작되었다. 사진기 한 대가 작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것이다. 그렇다고 사진을 전공하지도 않았다. 그저 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 지내다 제주도의 바람이 된 작가이다.

 

바람을 안고 초원을 떠도는 사람

김영갑은 끼니 채울 돈으로 필름을 사고 들판의 당근과 고구마로 허기를 달래야 했을 만틈 물질적으로 부족했다. 하지만 다양한 표정으로 유혹하는 제주도의 자연을 사각의 카메라 앵글에 담아 소유할 수 있었기에 마음만은 풍요로운 예술가였다. 마치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끊임없는 수행하는 고독한 수도승처럼 제주도의 곳곳을 누비며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새벽녘 오롯이 들판에 서있는 나무, 시시각각 황홀하게 피어오르는 구름, 원시적 건강함으로 속살을 드러낸 오름, 일순간 지평선을 덮어버리는 안개, 사나운 바람에도 눕지 않고 춤추는 억새 등 제주도의 자연은 작가에게 온갖 시련을 이겨내고 죽음과 맞설 수 있었던 신앙과 같은 존재였다. 제주도의 중산간지대에는 여러 가지 색이 풍견을 만든다. 짙은 갈색의 대지는 봄이면 지천으로 널린 유채꽃의 노랑과 어우러지고, 여름이면 삼나무의 초록빛과, 가을이면 솜털을 드러낸 황토색의 억새 그리고 겨울이면 소복하게 내린 하얀 눈과 흑백의 대조를 이루며 어느 계절 하나 아쉬움 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든다. 이처럼 매 계절 시시각각 변화하는 제주도의 자연을 김영갑은 ‘삽시간의 황홀’이라고 표현 했다. 찰나의 순간은 참고 기다리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처럼 작가의 눈앞에 펼쳐진다. 그리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사진으로 담기위해 작가는 눈을 감아도 보일만큼 중산간지대(中山間地帶/해발고도 200~500m)곳곳을 쉼 없이 오르내렸다. 그래서 그의 사진앞에 서면 바람소리가 들리고, 유채꽃 향기가 피어오르고, 아련한 잔상이 가슴에 새겨진다.

 

숨 막히는 아름다움 이면의 역설과 은유

사진은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수단이다. 그래서 ‘사진은 언어’라고 한다. 구체적이고 지시적인 사진의 기능은 다른 어떤 조형예술분야보다도 언어에 가깝다는 것이다. 김영갑 사진이 평범한 풍경사진에 그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제주도의 자연과 도민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는 거절하지 못할 제안처럼 작가를 자극했다. 그리고 그는 때로는 은유적으로 때로는 역설적으로 사진을 매체로 세상과 소통했다.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김영갑 사진의 깊이감은 사진을 향한 치열했던 삶과 뭍사람들이 갖는 섬에 대한 환상을 오버랩(overlap)시킨다. 그리고 그는 사진을 통해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움 이면에 숨겨진 제주도 사람들을 삶을 들여다 보라고 한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척박한 대지에 생명을 움트게 하고, 고단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긍정적으로 삶을 지켜왔던 제주 토박이들의 설움을 말이다. 사진은 단 몇 초로 끝나는 현상(現像)의 기록이다. 특히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사진은 회화처럼 인위적 조합으로 그려지는 이상적인 구도를 설정할 수 없다. 때문에 셔터를 누르기 전까지 피사체를 눈에 담고 마음에 기록하는 지난한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마치 오지를 찾아 생명을 키우는 화전민처럼 김영갑은 척박한 자연을 카메라 앵글에 담아 숨 쉬게 하였다.

 

여백이 있는 정중동(靜中動)의 미학

이번 전시는 김영갑 작고 후 서울에서 갖는 첫 번째 개인전으로, 1996년부터 시작된 제주도 중산간지대의 파노라마 사진 중 2000년 이후 촬영된 미공개작 40여점으로 구성되었다. 김영갑 사진은 정형화된 회화적 구도가 아닌 과감하게 화면중간을 가로지르는 수평구도를 특징으로 한다. 왜냐하면 제주도의 광활한 지평선을 가장 아름답게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파노라마 사진은 가로와 세로가 약 3대1의 비율로 하늘과 땅의 경계에 있는 나무나 오름 등의 주제를 더욱더 부각시킨다. 그래서 작가의 사진세계도 파노라마 촬영에 이르러 그 정점을 이루게 된다. 두 번째 특징은 색채․형태․구성의 단순화이다. 주제를 강하게 전달하는데 ‘단순화’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지만, 조형적으로 보았을 때 절제된 화면구성은 때로는 단조로움을 불러온다. 그러나 김영갑 사진에는 단순화로 인한 단조로움을 찾아보기 어려운데, 그것은 주제에 따른 빛의 조절에 있다. 때로는 밝게, 때로는 어둡고 무겁게 주제에 따라 빛의 양과 그에 따른 음영(陰影)을 조절하면서 소재들 간에는 미묘한 조화가 만들어지고, 작가의 의도는 더욱더 분명하게 드러낸다. 결과적으로 김영갑 사진에서 수평구도와 주제의 단순화는 여백을 만든다. 여백의 의미는 ‘쉼(休)’이다. 논리적 설명으로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라, 공기가 흐르는 호흡의 공간이다. 자연을 구성하는 사소한 요소들이 나름의 생존의미를 부여받고,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조용한 가운데서도 자연이 속삭이는 움직임이 느껴지는 정중동의 미학이 그의 사진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48년 짧은 생을 살았던 김영갑이 카메라 앵글을 통해 바라 본 세상은 고스란히 남아 우리들의 마음에 아로새겨진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존재하면서 만(萬)가지 임무수행으로 분주한 우리의 일상에 잃어버린 지평선에 너머의 꿈을 찾아 주는 의미 있는 전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