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실려온 사진, 바람에 실려간 영혼 - 진동선

바람에 실려온 사진, 바람에 실려간 영혼

 

진동선 (사진평론가, 현대사진연구소장)

 

 

나무는 열매에 집착하지 않는다. - 김영갑

 

한 사진가가 있었다. 사진이 삶의 전부였고 사진을 떠난 삶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사진가가 있었다. 20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사진의 열정을 불태우다 바람처럼 사라져간 사진가가 있었다.

 

김영갑. 우리는 그를 바람의 사진가로 기억한다. 평생 바람과 마주했던 사진가, 바람을 떠나 삶을 말할 수 없고 바람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한 발짝도 사진 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 사진가였다. 때문에 그의 사진 앞에서는 그가 20년 동안 바람 앞에 섰던 삶의 정황들과, 바람의 의미와, 그 바람의 실체에 대해서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김영갑을 만들고, 그의 사진을 만들고, 그를 데려간 것은 바람이었다. 이제 나는 그의 모든 것이었던 바람을 찾아 나선다. 용눈이오름을 오르고 또 그의 온 마음을 빼앗은 중산간 둔지봉 들판을 거닌다. 도처에 바람이 인다. 한 사진가의 청춘을 사로잡은 바람. 한 사진가의 영혼을 빼앗은 바람. 그 바람과 마주한다. 바람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를 놓아주지 않았던 바람의 정체는 무엇이던가.

 

뭍에서 사진해도 좋았을 것을 왜,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흘러들어 왔을까. 척박한 섬에서 고단한 사진의 길을 걸으려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정녕 바람 때문인가. 정녕 바람을 찍고 싶어서인가. 바람 속을 걸어본다. 그가 만나고 싶었던 바람, 그가 사진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바람이다. 그러나 바람은 미완성이다. 아니 애초부터 완결지을 수 없는 미완의 모습이다. 제주의 바람은 완결될 수 없는 삶이고 역사이다. 그렇다면 그는 무모했는가. 아니다. 완결될 수 없는 미완의 프로젝트이기에 도전할 가치가 있었고, 또 그것이 삶이고 역사였기 때문에 예술혼을 걸 만했다.

 

바람을 향해 나아간다. 그가 바라본 바람의 형상을 찾는다. 저것인가. 그가 20년 동안 달라붙은 바람의 형상이 저것인가. 진정 그토록 찾았던 바람, 그토록 표현하고 싶었던 바람의 모습이 저것인가. 뭍에서 방금 날아온 이방인에게는 그저 평범한 풍경이다. 당연할지 모른다. 예술의 모습은 그러지 아니한가. 영혼을 빼앗겨본 적이 없는 자가 어찌 바라볼 수 있겠는가.

 

고독했다. 아니 절망했다. 뭍에서 건너온 여느 작가들처럼 그도 풍광 좋고, 예쁘고, 사진되는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좀 더 일찍 유명해졌을 것이고, 삶도 훨씬 더 풍요로웠을 것이다. 또 바람에 영혼을 저당 잡히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유명세와 행복함을 뒤로 하고 사시사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같은 장소, 같은 대상, 멋질 것 없는 중산간 들판을 어슬렁거렸다. 바람 때문에,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바람 때문에 그렇게 가야 할 운명이었다.

 

둔지봉 주변을 거닌다. 그토록 잊지 못했던 그의 둔지오름이다. 삶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이곳을 그리워했다. 눈만 감으면 떠오른 그리움의 풍경이라고 했다. 그의 눈이 되어, 마음이 되어 그곳을 걷는다. 멀리 북동쪽 지평선을 바라본다. 개발로 인해 아쉬움과 연민의 풍경이 되었다고 한 그곳이다. 그의 말처럼 고요하고 적막하고 평화롭다.

 

다시 발길을 돌려 오름 좌현으로 돌아 남서쪽 비포장길로 오른다. 그가 사랑했던 길이다. 늘 아꼈던 길이고 늘 마음에 담았던 길이다. 이곳에서 바라본 둔지봉 풍경을 좋아했다. 또 이곳에서 바라본 들판과 그 속의 사람들을 좋아했다. 아주 평범한 풍경을 제주의 정체성으로 확장했다. 아름다운 곳이라고는 전혀 없는 풍경, 그는 그 평범함을 가장 제주다운 풍경으로 바라보았다.

 

그랬다. 사진이 그런 말을 한다. 평범하고 소박한 풍경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풍경이라고. 생명을 주는 호흡이 뭐 특별할 게 있느냐고. 맞는 말이다. 사진의 미학은 여기에 있다. 사진도 삶처럼, 호흡처럼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래야 수용되고 오랫동안 품에 안겨지는 사진이 된다. 사진을 사진답게 하는 것은 자연성이다. 미학의 정토는 바로 이것이다. 풍경을 만든 삶, 삶을 만든 풍경을 꿰뚫는 것이 사진의 철학이다. 철학만이 진정한 사진을 만들고, 삶을 수용하는 사진만이 미학이 될 수 있다.

 

다시 발길을 돌려 중산간 들판으로 나아간다. 이 바람 속에서 그가 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너른 대지가 꿈꾸게 했던 것은 무엇일까. 존재감이다. 평범함과 소담함, 늘 그 자리에 있는 것,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것, 삶이 존재이고, 존재가 삶이 되는 존재성이다. 그는 존재의 황홀함에 빠졌다. 마지막 삶 앞에서 그가 둔지 오름을 사랑한 것도, 그리워하고 잊지 못한 것도 존재의 위대함이다. 특별할 것도, 멋질 것도 없는, 그저 평범한 둔지 오름의 존재에서 그는 은은한 황홀감을 맛보았다.

 

그의 사진에서 바람이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난 곳은 그래서 들판이다. 그는 들판에서 바람의 존재를 깨닫는다. 은은한 황홀에 빠진 곳이 둔지봉 들판이다. 그곳에서 살아 있는 생명과 계절감을 맛본다. 중산간 들판에 부는 바람은 계절의 존재감이다. 철따라 달라지는 작물들, 그것을 일구는 농부들의 모습은 자연성이다. 들판은 오감을 열게 한다. 중산간 들판을 휘몰아친 바람의 속살이 바로 자연성이다.

 

풍경을 찍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바람을 그저 마음에 담으려 했다. 그랬기 때문에 눈을 확 끄는 미려한 풍경이 아니라 소담한 자연주의적 풍경이 담겨진다. 또 그랬기 때문에 일 년 열두 달,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중산간 들판을 찾고 돌담이나 나무 그늘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하늘, 땅, 나무, 풀, 돌 등을 바라보았다.

 

다시 발길을 돌려 북동쪽 바람맞이 들판으로 나아간다. 둔지봉을 넘어온 바람은 너른 지평을 휘몰아친다. 그곳에 키 작은 소나무 몇 그루가 서 있다. 어디를 봐도 우람한 데 없고 어디를 봐도 빼어난 곳이 없다. 바람맞이 들판에 외롭게 서 있는 작고 작은 평범한 소나무. 소재로서도 어울리지 않고, 대상으로서도 뛰어남이 없는 밭고랑의 소나무이다. 그것들에 그는 아주 오랫동안 눈길을 주었다. 전적으로 바람과 더불어 사는 존재의 애잔함 때문이었다.

 

사진은 말한다. 하찮음 속에 존재의 깊이가 있다고. 또 하찮음 속에 존재의 저마다 삶의 아픔이 있다고, 그랬다. 들판의 소나무들을 보고 그는 가슴 뭉클해 했다. 들판의 소나무들이 삶을 버텨내는 의지의 형상으로 보였다. 그래서 불현듯 가슴이 뭉클해지고, 순간 자신에게 찾아온 자연의 위대한 메시지로 수용한다. 삶을 버텨내는 의지의 소나무에서.

 

중산간 들판에서 그가 읽었던 삶의 메시지를 읽는다. 하찮음을 볼 수 있는 눈을 키우고, 존재들의 삶의 의미를 보고, 그리고 위대한 자연성을 껴안는다. 사진에서 그것들은 미세한 시간의 균열과 간극으로 나타난다. 또 간극 사이로 흡입하는 아름다운 자연의 질서로서 자리한다. 이것이 그의 사진이다. 삶을 만드는 풍경, 풍경을 만드는 삶을 헤아리는 미학적 정토이다. “삽시간의 황홀”은 하찮은 존재들이 순간 위대한 존재감으로 나타나는 미적 섬광이다.

 

들판은 바람의 모습이다. 바람을 따라 들판을 배회한다. 그가 눈길을 준 풍경을 훑는다. 바람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제주를 볼 수 없고, 바람을 모르고서는 한 발짝도 사진 안으로 들어설 수 없다고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저 들판의 소나무가 그가 표상하려 했던 바람의 실체인가. 저 소나무들이 사진 속의 소나무들인가. 고개를 돌려 오랫동안 애착을 주었다는 작은 소나무에 눈길을 준다. 그곳에 바람이 인다. 그가 말한 “내 안에서 부는” 존재의 바람이다.

 

들판의 바람은 되돌려지는 시선 속에 있었다. 사진 속의 바람은 결코 물리적인 것만이 아니다. 흔들림만이 바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중산간 들판의 바람은 존재를 향해 되돌려지는 시선이다. 존재를 보게 하고, 존재의 삶을 직시하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시선의 되돌려짐이다. 그 점에서 내 안의 바람은 소나무의 시련이 존재의 시련으로 되돌려지는 시선이고, 그리고 또다시 혹독함과 강인함으로 되돌려지는 시선이다. 사진은 이렇게 시선을 되돌려 준다. 고독하게 선 나무의 존재를 헤아리게 하고, 별나지 않은 나무 한 그루의 삶이 얼마나 유장한가를 보게 한다.

 

사진에서 바람이 또 다른 형상으로 자리하는 것이 오름이다. 오름은 풍광이 아니다. 제주 사람에게 오름은 늘 거기에 있는 살아 있는 존재이다. 그랬기에 그도 매일 오름을 오르고, 오름과 대화하고, 오름과 더불어 살았다. 오름은 그에게 사진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의 대상이었다.

 

그의 눈길과 발길을 따라 용눈이오름을 오른다. 바람이 인다. 바람이 이끄는 대로 오름의 지평을 향한다. 오를 때마다 되돌아보는 것은 건너편 다랑쉬오름이다. 모든 오름은 하나이다. 그가 20년 동안 오름에서 찾은 것은 이것이다. 하나되는 오름. 이곳 용눈이오름에서 그 하나됨을 보았다.

 

오름에 바람이 실어온 빛이 있었다. 빛은 바람이 만들었다. 그래서 바람을 볼 수 있는 자만이 빛을 볼 수 있었고, 빛을 볼 수 있는 자만이 오름을 볼 수 있었다. 하늘과 땅이 오름을 통해서 맞닿았다. 그의 표현처럼 오름은 땅이면서 동시에 하늘이었다. 오름에 그는 자신의 영혼을 저당 잡혔다. 사진을 위해 영혼을 건넨 것이다. 오름에 그는 삶을 던졌다.

 

오름에서 보고자 했던 것은 빛과 그림자였다. 빛은 하늘이고 그림자는 땅이었다. 분리될 수 없는 하나였다. 그래서 오름의 멋진 형태도, 누구나 좋아하는 조형적인 모습도 꿈꾸지 않았다. 대신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사철 오름을 휘감고 도는 바람을 담으려 했고, 바람이 데려온 하늘의 빛과 땅의 그림자를 포착하려 했다. 오름에서 빛과 그림자는 하나이다. 오름에서 발과 눈이 하나이듯이 하늘과 땅은 하나이다. 용눈이오름이 빛이라면 다랑쉬오름은 그림자였고, 다랑쉬오름이 빛이었다면 용눈이오름은 그림자였다.

 

하나된 오름을 위해 줄기차게 중산간 오름을 올랐다. 오름은 생과 사의 접점이면서 동시에 동질성의 모습이었다. 제주 사람은 오름에서 태어나 오름에서 죽었다. 삶의 터전일 뿐만 아니라 생과 사가 공존하는 무대였다. 오름은 결코 관광 자원, 관광 코스가 아니었다. 사진 무대는 더더욱 아니었다. 인간과 오름의 동질성을 그는 오름의 빛과 그림자에서 찾으려 했다.

 

오름은 시시각각 변하는 존재의 풍경으로 나타났다. 계절에 따라, 기상에 따라, 시간대에 따라, 보는 위치, 각도에 따라 시시각각 모습을 달리하는 존재의 풍경으로 나타났다. 그가 말한 “삽시간의 황홀”은 그것이다. 오름의 존재가 순식간에 드러나는 절정의 순간이다. 삽시간의 황홀은 오름이 보여줄 수 있는 순간적인 속살이다. 모든 것을 걸고 모든 것을 태웠을 때 볼 수 있는 오름의 속살이다. 바로 제주 사람들의 생과 사이다. 그것과 만나기 위해서는 오름과 하나여야 했고 오름에 영혼을 저당 잡혀야 했다.

 

365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오름에 올랐다. 앉아서도 보고, 서서도 보고, 누워서 보았다. 그렇게 오름을 보았다. 그래야만 보였고, 그렇게 보아야 담을 수 있었다. 오름에 취하고, 오름에 빠지면 각박한 삶도, 어지러운 세상도 보이지 않았다. 오름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정화와 자정의 형상이었다.

 

사진에서 바람이 또 다른 형상으로 나타난 것은 구름이다. 바람은 구름을 일으킨다. 바람을 타고 오는 것이 구름이다. 구름은 살아 있는 것들의 덧없음이다. 또 생의 아스라함이다. 그는 구름에서 사라짐의 의미를 보았다. 그때부터 구름이 풍경의 중심이 되었다. 구름을 마지막으로 돌린 것도 돌이킬 수 없는 존재의 애잔함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구름은 이미지로 남는다. 존재의 덧없음은 곧 이미지이다.

 

구름은 하늘의 모습이었다. 들판이 땅을 상징하고, 오름이 하늘과 땅을 상징했다면, 구름은 공화(空花), 즉 덧없음의 하늘이었다. 구름은 선도, 형도, 면도 없다. 빛도, 색도, 그림자도 없다. 모든 것이 부정형이며, 모든 것이 예정되지 않는 순간의 형상이다. 그런 구름을 들판에서, 오름에서, 길가에서 심지어 밭담과 나무 사이에서 보았다. 어떤 날에는 구름을 따라가고, 어떤 날에는 구름을 떠나보내고 돌아왔다. 구름은 영혼의 자국이었다.

 

바람에 실려온 것이 사진이라면 구름에 실려간 것은 영혼이었다. 바람, 사진, 구름은 하나같이 사라짐과 소멸을 예정했다. 사진이 곧 영혼이었다. ‘구름이 내게 가져다 준 행복’은 사진으로 되돌려진 영혼의 모습이다. 세상을 사는 존재 이유가 그에게 사진이었다. 사진은 영혼이었고, 바람이었고, 구름이었다. 20년 동안 중산간을 헤매게 한 요체들이었다.

 

김영갑의 사진 인생 20년. 그것들이 어떻게 한 사진가의 지난한 삶을 말해줄 수 있을 것인가. 또 그것들이 어떻게 사진과 맞바꾼 영혼을 말해줄 수 있을 것인가. 작가란 그런 것인가. 질긴 삶의 피로를 사진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인가. 그렇기에는 지난 삶이 너무 쓰라리다. 한 사진가가 평생을 마주했던 삶의 정황은 사진으로 채우기에 역부족이다. 그 인들 몰랐을까.

 

김영갑은 “나무는 열매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긴다. 바람이 지나는 길목에 서 있는 나무가 어찌 열매에 집착할 수 있는가를 뜻한 것이다. 이것이 그의 사진 철학이다. 죽음 직전까지 그는 자신이 겪은 고생은 행복이었다고 말한다. 고단했던 삶이 오히려 편안했다고 말한다. 또 누구로부터 눈길을 받지 못한 때가 더 행복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절반의 행복이다. 살아서는 채울 수 없는 절반의 행복이다.

 

마지막 삶의 언저리에서 그는 반짝 매스컴으로부터 그리고 대중들로부터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되찾은 절반의 행복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순수성과 예술혼을 오염시켰을지 모른다. 또 그런 일들이 그를 더욱 힘들게 했을지 모른다.

 

아주 짧은 시간 속에서 그를 본 적이 있다. 또 아주 짧은 시간에 그가 영혼을 던진 사진의 무대를 밟았다. 때문에 그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의 사진 세계를 말하려 한 것은 한 사진가의 20년의 세월과, 그 세월 동안 일궈낸 사진들과, 그 속에 담긴 예술혼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다.

 

평론가로서 한 사진가의 지난했던 삶을 일찍 헤아리지 못한 후회, 아쉬움, 안타까움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땅에 그런 사진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역사적 관점에서 말하고 싶다. 사후 일 주기를 맞이하여 출간되는 사진집의 의의는 그것이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아니 작가는 생의 존재 이유를 작품집에서 찾는다.

 

이 사진집이 김영갑이라는 사진가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또 그가 걸어온 지난 20년 사진 세계를 바라보는 단초가 되길 바란다. 그것이야말로 잃어버린 그의 절반의 행복을 되찾아주는 일이거니와 작가는 죽어서 평가받는다는 미술사의 오랜 진리를 복원시키는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