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 7] 오름 그리고 억새의 사계
오름 그리고 억새의 사계

한라산 자락 어디에든 널부러진 억새들 사이로 한참을 헤집고 다니노라면 제주도와 제주사람들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제주 토박이들의 삶을 이해해야 한라산의 아름다운 비밀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앞서 떠난 토박이들의 삶을 이해하지 않고는 제주도 내면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척박한 땅에서 모진 비바람을 견디며 생명을 이어가는 억새들 사이로 한참을 거니노라면 절로 제주도를 사랑하리라.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와 말 무리들만이 보일 뿐 텅 비어 있는, 중산간 광활한 초원의 적막함을 모르고는, 제주도를 이야기하지 못한다. 아주 오래 전부터 정적만이 감도는 평화스러움이, 사람을 편하게 하면서도 두렵게 한다. 중산간 초원에서는 풀과 돌과 대화하지 않고는 심심함을 풀 묘안이 없다. 외로울 때는 제주도의 모진 바람도 좋은 벗이 된다. 시도 때도 없이 몰려오는 짙은 안개가 사람을 눈물 나게 한다.
억새, 오름, 하늘 그리고 변덕심한 기후가 조화를 이뤄 하나가 될 때 한라산은 참으로 경이롭다. 그중 하나가 빠진다면 제주도는 인상적인 풍경에 불과하다. 제주도의 이색적인 풍경만으로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중산간 초원은 정적만이 계속되기에 삭막하다. 삭막함을 한 꺼풀 벗기면 사람을 흥분시키는 숱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삭막함 속에 감추어진 이야기를 발견해내지 못하고는 제주도와 제주사람들의 이야기를 논할 수 없다. 내면에 감춰진 제주도의 아름다움과 제주사람들의 역사를 이해하고 나면 절로 한라산을 사랑하리라.
한라산의 신비로움은 피나는 노력 없이는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랜 시간 고통을 인내하지 않고는 볼 수 없는 한라산의 경이로움을 노래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다. 제주도의 아름다움을 누구에겐가 전해 주려함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 시도가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이야기하면 할수록 그 아름다움은 점점 작아진다.
자연에 묻혀 풀처럼, 나무처럼 살다간 이들도 자연의 경이로움을 표현할 수 없었기에 자연은 신비롭다. 자연의 신비함에 누구도 침묵할 수밖에 없기에 자연은 오묘하다. 한라산의 자연은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서 참으로 아름답다! 한라산의 자연이 제 모습을 잃지 않는 한 모두가 사랑하리라.


김영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