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모악
[중앙일보 2008/ 4/25] 연재 ‘길 떠나는 책’ ⑧ 월리스 카우프만의 <길을 잃는 즐거움>

길을 잃다 혹은 삽시간을 얻다.

 

20년 넘게 제주도에서 오름 사진만 찍다 몇 해 전 루게릭 병으로 세상을 등진 사진가 김영갑을 만났을 때다. 그는 내게 오름의 경이로움을 알려준 주인공이었다. 만난 지 채 5분도 지나기 전에 그는 곧장 자신의 애마(폐차 직전의 빨간색 프라이드였다)를 타고 용눈이 오름으로 향했다. 그의 동작이 하도 빨라 무슨 쿵푸 스타를 만난 느낌이었다. 목적지는 구좌읍 송당리의 용눈이 오름. 강산이 두 번 바뀌는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촬영에 나섰던 그가 가장 사랑했다는 오름이었다.


재밌는 건 그가 용눈이 오름에 오르는 방식이었다. 제주의 오름을 한 번이라도 올라본 사람은 알겠지만, 정상에 이르는 길이 제대로 나 있는 오름은 거의 없다. 그가 용눈이 오름으로 우리를 안내한 건 벌써 10년 전의 일이니 그때는 더 그랬다.
‘산담’으로 둘러싸인 묘들을 지나 용눈이 오름을 오르는 동안 우리는 마르지 않은 소똥을 시도 때도 없이 만나는 통에 질겁했고, 하얀 캔버스 운동화가 색색의 들꽃으로 물드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마침내 오른 용눈이 오름 정상에서 김영갑이 말했다.
“새벽 4시 반이면 눈을 뜨고 이렇게 다닙니다. 파노라마 컷에 담아야만 제대로 된 맛을 느낄 수 있는 촬영 포인트를 향해 같은 길을 걷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발길 가는 대로 걷습니다. 놀라운 건 제주도의 오름과 들판이 단 한 하루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거기에 제가 붙인 수식어가 바로 ‘삽시간’입니다.”


그와의 인연에도 그가 붙인 수식어가 따라 붙은 걸까. 그의 사진작업을 두고 하룻밤 대화를 나눈 이후 두어 차례의 짧은 만남이 그와의 인연의 전부였다. 루게릭 병이라는 불치병을 앓고 있다는 건 TV 뉴스를 통해 들었고, 쾌유를 비는 마음만 가슴에 품었을 뿐이다. 그런 차에 김영갑과 다시 조우한 건 지난 해 5월쯤이었다. 그와 직접 대면한 것은 아니었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진심을 다해 관리한다는 갤러리를 찾은 것도 아니었다.


제주도 동쪽의 오름을 더 아꼈던 그를 떠올린 건 공교롭게도 제주도 서쪽에 위치한 오름에서였다. 우연히 합류하게 된 어느 여행단에서 혼자 빠져나와 ‘샛별’이라고도 불리고 ‘새별’이라고도 불리는 거대한 오름 앞에 섰을 때였다.
이른 새벽이었다. 제주의 천연기념물 중 하나인 ‘변덕스런 날씨’가 제대로 기운을 뻗치던 시각이었다. 오름을 향해 차를 달리던 우리에게 낯익은 복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개였다.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에 등장하는 안개쯤은 찜 쪄 먹고도 남을 짙은 안개였다. 언젠가 구 대관령 길을 넘다가 만난 안개, 초지대교를 지나 강화섬의 동막 방향으로 길을 틀었을 때 만난 안개와 비교가 되려나. 사방의 모든 지형지물을 지우고 거대한 잿빛 캔버스 하나가 눈앞에 다가선 느낌이었다.


아무리 짙은 안개가 저격수처럼 우리 일행을 노렸다고 해도 자주 다녔던 길이라 오름에 이르는 길을 가늠하는 건 쉬울 거라 생각했다. 가급적 오름 가까이 다가간 뒤 안개가 걷히면 정상을 향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우리 일행은 금세 길을 잃어버렸다. 있어야 할 지형지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길은 점점 거칠어졌다. 이십분 쯤 헤매자 슬슬 공포감이 밀려온다는 사람도 있었다. 몇몇은 아예 모습조차 보이지 않고 목소리로만 거리를 가늠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내 경우는 조금 달랐다. 먼 거리의 시야로만 조감하던 제주의 들판이 새삼스러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억새와 들꽃과 자갈로 뒤덮인 들판 사이사이의 디테일이 눈에 들어오면서 자잘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태클로만 점철됐던 대도시에서의 공적인 스케줄들이 허공으로 솟았다가 안개와 함께 자취를 감췄다. 몇몇 이름 모를 벌레들이 발자국 소리에 놀라 혼비백산하는 모습도 눈에 잡혔다. 비가 그친 뒤의 찬 기운과 훈풍이 묘한 느낌으로 얼굴을 때렸다. 사진가 김영갑이 오름의 매력을 알려준 뒤 습관처럼 찾아다녔던 낯익은 길 위에서 ‘길을 잃는 즐거움’을 맛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쯤되면 월리스 카우프만이 쓴 <길을 잃는 즐거움>(강주헌 옮김, 나무심는 사람)을 떠올리지 않을 방법이 없다. 그 책에는 캐롤라이나 숲의 현자로 불릴 만한 월리스 카우프만 식 ‘길을 잃는 즐거움’이 담겨있다. 월리스 카우프만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길을 잃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오듀본 협회의 조류 관찰자들이 없었더라면, 오히려 길 잃은 것을 즐거워했을 것이다. 특히 내 땅이었기 때문에 더욱 즐거웠을 것이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 나침반을 준비했다. 이번에도 북서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언덕 정상을 넘었을 때, 나는 어디에서 방향을 잘못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흐린 날씨와 옅게 낀 안개 때문에 그곳에서 맴돌았던 것이다. 그 지역의 나무들을 잘 알고, 언덕 정상에 튀어나온 바위들의 형태와 흉터까지 알고 있었지만, 그날 아침에는 그것들을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꿈에서 깬 듯 시선을 공중으로 옮겼을 때 행운이 뒤따랐다. 들판 위로 축구 대표팀 전술 대형으로 포진해 있던 일행의 눈앞으로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거대한 오름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놀라지 마시라. 고작 10초쯤 지났을까. 규모만 놓고 보면 몇 손가락 안에 꼽힐 거대한 오름 하나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춰버렸다. 누군가의 탄식 소리가 새소리와 함께 제주의 들판에 울려 퍼졌다. 그때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단어가 바로 김영갑이 언급한 ‘삽시간’이었다. 말 그대로 삽시간의 일이었다. 10초짜리의 거대한 스펙터클은 아쉬움과 경이감만 안겨준 채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삽시간’의 경이로움 만큼 매력적인 경험 하나가 가슴 속에 추가됐던 탓이다. 바로 ‘길을 잃는 즐거움’이었다.


다시 카우프만을 불러들여보자.
“길 잃는 것을 두려워하면 진정한 삶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한다. 어린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이 세상에 뛰어들지만 자주 길을 잃는다. 11월의 그날, 실번은 어두운 숲에서 사라와 함께 밤을 보냈다. 실번처럼 모든 아이들이 그들의 부모가 야생의 땅에서 훌륭한 보호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들의 삶은 경이로움으로 가득할 것이다. 텔레비전은 물론이고 때로는 학교가 저지르는 가장 큰 범죄의 하나는, 아이들에게 위험한 세상에서 길 잃으면 안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때문에, 아이들은 길 잃는 즐거움을 외면한 채 자신감을 잃어간다. 대신 무엇인가에 끊임없이 이름을 붙이면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려 한다. 환경에 가장 커다란 위협은 레이철 카슨이 염려했던 그날, “봄은 오지만 새가 노래하지 않는 날”이 아니다. 봄은 오지만 경이로움이 없는 바로 그날이 가장 끔찍한 날일 것이다.”


길을 잃을 때 세상을 마음으로 얻게 된다. 삽시간은 곧잘 영겁으로 변하기도 한다. 길의 갑작스런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