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뭍, 중산간의 겨울

바다에 둘러싸인 제주는 너른 내륙을 품은 큰 섬이다.
사진가 고(故)김영갑은 검은 지표 아래 붉은 땅, 솟아야 할 지점에서 수그러든 오름, 태초의 모습을 간직한 나무와 들, 한라산이 땅으로 내려앉는 구간의 중산간을 조망했다. 대륙적인 비율의 파노라마사진에는 산화했던 대지만이 갖는 적요한 뭍의 면모가 펼쳐진다.

제주
겨울로 들어가는 길목의 제주는 누렇거나 잿빛이다. 언제든 울 준비를 마친 듯 하늘은 자주 어두워진다. 바람을 못 이겨 모두 떠난 대지를 채우는 건 유연한 억새와 끈질긴 잡초들. 잎맥을 가진 것들은 죄 탈색되어 누렇고, 금방 푸르렀던 하늘은 잠깐 사이 잿빛이 된다.
풀숲과 오름 사이, 외로이 선 고목은 외떨어져서도 건재한 제주처럼 고고하다. 저 너머 오름은 억새보다 색이 옅어 더 민둥해 보인다. 휴양의 이미지가 덧씌워진 관광지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제주는 에덴이 될 수 없다. 산과 바다 사이의 급한 경계를 다듬어 속이 깊어진 중산간이 있는 한. 숭고하도록 처연한 이 풍경은 제주의 이면이자 진정한 단면이다.

중산간
중산간(中山間)은 푸르고 붉다. 바다와 산 사이에 펼쳐진 땅, 중산간, 중간, 산간, 산중도 아닌 중산간이란 산중에서도 중간, 중간에 낀 산중이다. 중언부언이지만 산과 바다 중간에 낀 지대임을 강조한다. 중산간 지형을 형성하는 건 오름과 평원이다. 낮은 고도와 함몰된 분화구 덕분에 오름의 선들은 ‘둥그래당실’하다. 오르거나 보기에 순순한 오름이지만 끝없이 점층된 오름 무더기는 천군만마처럼 강력한 풍경이다. 해 든 자리와 해 진 자리의 명확한 음영도 풍경에 힘을 보탠다.
검고 굴곡진 암맥이나 화산 송이에 익숙한 이들에게 제주의 평원, 그중에서도 일군 밭의 풍경과 색은 낯설다. 바퀴 자국의 크기가 너른 밭의 넓이를 가늠케 한다. 한라산의 동쪽 중산간이 오름지대인 데 비해 서쪽 중산간에는 황토로 된 너른 땅이 남아 있다. 논물이 괴지 않는 현무암지대라 논농사를 할 수는 없지만 밭을 일구기에는 비옥한 땅. 밭은 제주 사람들을 살린 숨은 동력답게 선연히 붉다.

겨울
여느 곳의 겨울처럼 제주의 겨울을 지배하는 색 또한 검은색과 흰색이다. 검은 외곽선 안에 드문드문 흰 눈이 보이지만 한눈에는 까까머리 중학생의 두발처럼 잿빛으로 보이는 눈 내린 오름. 오름과 대지는 기저 선을 중심으로 확연히 구분된다. 오름에는 겨울이 완연히 내려앉았지만, 대지는 가을의 끝자락을 놓지 못한다.
제주 중산간은 인가와 마을, 인적이 드문 곳이다. 동식물의 수가 사람 수보다 수만 배는 많다. 눈 많은 겨울이 되면 오소리는 오름에 굴을 파 숨어들고 꿩은 더 깊은 산으로 날아간다. 억새와 잡풀마저 그 숨을 다하면 남는 것은 나무뿐이다. 기묘한 제 형상을 여실히 드러낸 나무는 뭉친 구름 앞에서 더욱 가냘파진다. 대지 위에 살아남은 건 오름과 나무, 그리고 안개 자욱한 겨울뿐이다.

그리고 김영갑
제주를 연모해 모든 것을 버리고 제주 품에 안긴 사진작가 김영갑. 1957년 부여 출신의 젊은이는 20대 중반, 제주에 눌러앉았다. 연인을 대하듯 제주의 온 데를 다니며 열렬한 구애를 펼쳤다. 인적 없는 중산간을 홀로 누비며 숱한 오름과 들, 거센 비와 바람과 눈과 구름을 사진으로 남겼다. 루게릭병 진단을 받고도 떨리는 육신으로 카메라를 둘러멨다. 쉰을 목전에 둔 나이에 제주와 이별, 영영 이별을 고한 김영갑은 죽어서도 제주를 떠나지 않았다. ‘최고로 황홀한 순간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삽시간의 황홀이다.’ 그토록 붙들려 했던 황홀한 순간과 함께 그는 사진 안에서 영생을 얻었다.

글 장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