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섬을 참으로 사랑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전국의 풍광을 찾아 떠돌다 20대 후반에 제주도의 아름다움에 빠져 방황을 멈추고 닻을 내렸다. 그후 20여년 동안 제주만 밟으며, 제주만 바라보며, 제주만 기록하며, 제주만 명상하며, 제주만 호흡하며 살았다.

밥벌이가 없었던 그는 한 번도 변변히 먹어 본적이 없었고, 그야말로 동가식서기숙했다. 자존심이 강했던 그는 없으면 굶었고, 라면이 여의치 않으면 냉수 한 사발로 저녁을 대신했다. 거처할 곳을 찾아 이 마을 저 마을을 한 없이 떠돌아 다녔다. 시골방 한 칸에도 어디서 왔는지, 고향은 어딘지, 애들은 몇인지, 직업이 무엇인지 질문이 계속 되었고, 제주의 인심은 육지 것으로 그를 매몰차게 문전박대했다. 들판의 새들과 길가의 난방초는 뿌리내릴 걱정이 없었으나, 이 위대한 예술가는 잠시 몸 기댈 곳도 없었다.

산야를 배회하다 집에 들면 지서에서 달려들어 잡아다 문초했다. 생활비는 어디서 버는지, 어딜 다녀왔는지, 왜 제주에 이렇게 오래 머무는지, 성장과 가족 관계는 어떤지, 새벽이 돼야 간신히 풀려나는 게 다반사였다. 겨우 정을 붙이면, 집주인은 제발 집을 비워달라고 험한 소리까지 퍼부었다.

하루 종일 가방을 메고 들판을 거닐고, 지치면 한가히 제주를 명상했다.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늘 혼자였고, 누구 찾아와도 거처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바느질이었다. 천 조각을 모아 정성스럽게 꽤매어 조끼나 저고리를 만들어 감물로 염색을 하고 입고 다녔다. 커튼도 만들고 이불보도 만들었다. 특히 울적하고 불안한 날에는 바느질이 최고 약이었다.

그는 마라도를 특히 좋아했다. 첫 눈에 반하여 헤어날 수 없을 정도로 빠졌다. 찾을수록 매혹되어 일주일도 살고 한 달도 살았다. 마라도의 바람과 일출을 특히 사랑했다. 그러나 이 섬에 교회와 시설들이 들어서자 찾지 않았다. 그에게는 두 명의 모델이 있었다. 마라도의 두 아이였다. 초등학교 입학할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두 아이의 생활 모습을 꾸준히 사진에 담았다. 나는 아직 그 아이들 사진을 보지 못했다. 아마 그의 사진에 등장하는 유일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부터 그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통증에 시달렸다. 자고나면 머리가 한웅큼씩 빠지고, 결국 손발의 근육이 사라져 뼈만 남았다. 루게릭병이 그를 찾아 온 것이었다. 수저도 들지 못하고 침도 삼키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병고의 고통 속에서도 그는 ‘김영갑 갤러리 모두악’을 만들었다. 6년의 투병 끝에 그는 이 갤러리에서 잠들었고, 그가 남긴 마지막 육신도 맑은 영혼과 함께 그 마당에 뿌려졌다. 그가 남긴 20만장의 바람의 섬 기록만이 그 곳을 지키고 있다.

나는 오늘도 그의 유고집 속에 담긴 70여점의 사진을 본다. 사람과 새는 물론 동물이라곤 점 하나 찾을 수 없다. 움직이는 물체는 바람, 파도, 무지개, 태양뿐이다. 그가 우리에게 남기고 싶었던 이야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영원한 것은 자연이고, 그 언저리에 왕래하는 인간과 생물들은 그 저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이라는 얘기였을까?

그는 알고 있었다. 섬 제주가 사라져도, 바람 속 풍광과 그의 영혼은 모두악 그 곳에 영원히 살아 있으리라는 것을.

이영운 <제주외고 교장,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