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다르게 보기-(上) 사진가 김영갑의 이어도

요즘 제주도가 붐빈다. 해외여행 대신 제주를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제주를 다르게 보는 여행법을 소개한다.
 
제주도를 다시 보게 된 것은 2005년 작고한 사진가 김영갑 때문이었다. 별것 아닌 돌담과 밭고랑, 민둥민둥한 오름이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달력 속의 풍경만 찾아다니던 때 오름과 들판도 아름답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보면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다르다는 것은 진리다. 장삼이사들이 눈길조차 주지 않는 풍경에서 예술가들은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김영갑이 생전에 구름언덕이라고 표현했던 둔지봉 일대. 김영갑은 루게릭병으로 누워 사진작업을 하지 못했던 5년 동안 가장 선명하게 떠오른 곳이 둔지봉이었다고 했다. 사진제공 | 두모악갤러리

 

김영갑 때문에 제주에 눈을 뜬 사람은 ‘나’ 말고도 많은 모양이다.

 

2007년 제주도의회가 마케팅회사 아름기획에 의뢰해 1004명의 관광객을 대상으로 가장 만족한 제주관광지를 조사한 결과 1위로 뽑힌 곳이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이었다. 거기선 관광책자나 팸플릿에 나오는 제주와는 다른 제주를 볼 수 있다. 이번 여행은 김영갑의 눈으로 본 제주다.

 

그럼 김영갑이 평생 사진을 찍어온 곳은 어디일까? 대부분 동부 중산간지대에서 촬영했다. 이 일대가 오름왕국이다. 제주에서 오름이 가장 많다.

 

김영갑은 <그 섬에 내가 있었네>에서 ‘중산간의 초원에는 눈을 흐리게 하는 색깔이 없다. 귀를 멀게 하는 난잡한 소리도 없다. 코를 막히게 하는 역겨운 냄새도 없다. 입맛을 상하게 하는 잡다한 맛도 없다.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 나는 그런 중산간 초원과 오름을 사랑한다’고 썼다.

 

수많은 오름 중에서 그가 즐겨 찍었던 곳은 용눈이 오름과 둔지봉 일대다. “용눈이 오름? 나도 가봤는데…”라고 말할 사람도 물론 많을 것이다. 한 두 번 보고 다 봤다고 할 수 없다.

 

둔지봉 가는 길목, 아끈다랑쉬 오름 앞에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사진촬영을 위해 키운 유채와 달리 자연스럽게 조성한 유채밭은 봄철 촬영포인트로 좋다. 김세구 선임기자

 

김영갑은 여기서 찍고, 또 찍었다. 20년을 찍었다.

 

“사실 삼촌(김영갑)도 어디서 얼마나 찍었는지 몰랐어요. 같은 시기에 여러 언론과 인터뷰했는데 (지금까지 찍은 필름이) 어떤 때는 2만장, 어떤 때는 7만장이라고 답했죠. 필름은 수장고에 보관해뒀는데 정확한 수는 세어보지 못했어요.”

 

제주오름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난 용눈이오름. 김영갑은 20년이나 용눈이를 찍고 또 찍었다.

 

갤러리 두모악 박훈일 관장은 “처음 사진을 찍겠다고 했을 때 저를 오름에다 내려주고 그냥 가버렸고, 오름 하나에만 1년을 매달렸다”고 회상했다.

 

용눈이 오름엔 기자도 여러 번 가봤다. 용눈이는 참 잘생겼다. 오름선이 부드럽고, 매끈하다. 요즘 아이들 표현으로 치면 완벽한 ‘S라인’이다. 제주 오름 중 미스코리아 오름이라고 할 만하다. 오름은 다면체다. 전후좌우, 위 아래 풍경이 다 다르다.

 
김영갑은 드센 바람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억새와 나무들을 통해 생명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사진은 다랑쉬오름.

자, 그럼 용눈이 촬영포인트가 어딜까? 그건 ‘사진가 맘대로’다. 사진동호인이라면 답답해하며 구체적인 질문을 할지도 모른다. “언제 빛이 좋아요? 새벽이 좋아요, 일몰이 나아요?” 답은 따로 없다. 그 때 그 때 다르다. 사실 김영갑이 찍은 것은 제주의 외면이 아니라 내면이었다.

 

‘내가 사진에 붙잡아 두려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 아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들판의 빛과 바람, 구름, 비, 안개이다. 최고로 황홀한 순간은 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삽시간의 황홀이다. 셔터를 누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강렬한 그 순간을 위해 같은 장소를 헤아릴 수 없이 찾아가고 또 기다렸다.’ (사진집 <김영갑>)
 
용눈이와 함께 김영갑이 천착했던 둔지봉도 가봤다. 김영갑이 ‘내 영혼을 사로잡아 섬에 홀리게 만든 마력이 숨어있다’고 고백했던 오름이다. 둔지봉은 비자림 서쪽에 있다. 경사진 구릉밭에서 보는 구름이 아름다워 김영갑은 이 일대를 ‘구름언덕’이라고 불렀다. 90나무 서너 그루, 밋밋한 능선…. 겉보기엔 지극히 평범했지만 사진은 섬뜩할 정도로 강렬했다.
 
“삼촌은 ‘368개 제주 오름 중 둔지봉은 형태, 모양만 보면 안 예쁘다. 뒤에서 몇번째일 거’라고 했죠. 하지만 거기서 제주의 바람, 비, 안개 등 자연을 표현하고 싶어했어요. 척박한 환경에서 가난했지만 거지도 없고 대문도 없었던 그런…, 그게 삼촌의 이어도였죠.”
 
해석을 덧붙이자면 김영갑은 제주의 풍경을 완성하는 이는 농부들이라고 했다. 사진집에서 김영갑은 ‘유채, 감자, 당근, 콩, 메밀, 조, 산디(밭벼), 목초…, 어떤 곡식을 재배하느냐에 따라 그곳의 풍경이 달라진다’고 썼다.
 
김영갑의 사진을 보면 아름다움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사진은 눈으로 찍는 게 아니라 가슴과 머리로 찍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봐야 한다. 날씨 나쁘다고 해가 안 떠 운이 없다고 타박하는 것은 제주의 속멋을 볼 수 없다는 의미다.

 

‘시인은 단어 하나로 몇 달을 아파하고, 화가는 선 하나로 몇 년을 아파한다. 사진가는 셔터 한 번 누르기 위해 며칠 기다리다가 이내 운이 나쁘다고 투덜거린다.’(<그 섬에 내가 있었네>) 오히려 김영갑은 ‘햇빛쨍한 날보다 안개 짙고 가랑비 내리는 날이면 발동이 걸린다’고 고백했다. 미(美)를 발견하고 셔터를 누르는 기쁨을 그는 오르가슴이라고 표현했다.
 
자, 이제 오름 앞에서 셔터를 눌러보자. 앵글 속에 넣어야 할 것은 산도 들판도 낙조도 아니다. 바로 당신의 마음이다.

-길잡이-
*김영갑은 1985년부터 제주도에 살다가 2005년 루게릭병으로 48세에 요절했다. 중산간 오름을 통해 제주의 속모습을 알린 작가다.
 
*서귀포 삼달리 갤러리 두모악에 김영갑 사진이 전시돼 있다. 입장료는 어른 3000원, 어린이 1000원. 4월말까지는 연중 무휴, 5월부터는 매주 수요일 쉰다. www.dumoak.co.kr (064)784-9907
 
*사진집 <내가 본 이어도 1~3권> 중 1권은 ‘용눈이오름 바람에 실려보낸 이야기’편이다. 용눈이오름 사진이 많다. 사진집 <김영갑>, 자서전 <그 섬에 내가 있었네> 등을 참조하면 좋다. 갤러리에서도 살 수 있다.

*용눈이오름은 송당사거리에서 16번 도로를 따라 하도 3거리 까지 간다. 삼거리에서 300~400m만 가면 용눈이오름이다.
 
*둔지봉은 찾기 힘들다. 매월 마지막주 금요일에 실시되는 ‘내가 본 이어도 2009’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4월 24일 촬영예정지는 둔지봉 일대다. 오후 4시30분 두모악갤러리에 모여 둔지봉으로 이동한다. 일몰까지 촬영한다. 참가비는 1만원. 인터넷카페(http://cafe.naver.com/dumoak1)의 2차답사란에서 신청할 수 있다.
 
최병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