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모악
[레이디경향 2008/04] [프런트 에세이] 작가 구경미의 나를 돌아보는 시간

오랜만에 산에 올랐다. 느릿느릿 걸어도 집에서 10분밖에 걸리지 않는 산을, 높지도 않고 험하지도 않은데 겨울 동안에는 한 번도 가지 못했다. 산뿐 아니라 공원도, 동네 산책도 거의 하지 않았다. 자전거로 한강을 달리지도 않았고 곧잘 걸어서 다니던 도서관에도 가지 않았다. 짧지 않은 겨울 동안 나는 집 안에만 웅크리고 있었다. 무엇이 나를 집 안에만 가둬두었을까.

 

그런데 이제, 봄이 왔다. 봄이 오자 내 몸은, 지난날의 기억을 되살려 자꾸만 밖으로 나가고자 했다. 며칠 전 3월이 되고나서 처음으로 자전거를 타고 한강으로 나갔다. 햇빛도, 하늘도, 물결도 눈부셨다. 자전거를 타다가 끌다가 했다. 기억은 온전했으나 몸은 온전하지 않았다. 외출하지 않은 몇 달 동안 생긴 변화였다. 몸이 무너져 있었다.
 
그리고 오늘, 물병 하나를 챙겨 산에 올랐다. 평일이라 사람은 많지 않았다. 줄을 서서 약수를 받았다. 산에 오르고 내리는 동안 마실 물이었다. 등산로는 여러 갈래가 있었다. 바위를 타고 오르는 길을 택했다. 50도 정도 경사라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다. 나무가 적고 시야가 탁 트여 서울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봄가을에 어울리는 길이었다. 그러나 가끔, 땀에 흠뻑 젖고 싶거나 나에게 고통을 주고 싶을 때, 여름에도 오르곤 하는 길이었다.
 
걷다 쉬고, 또 걷다 쉬었다. 한번 무너진 몸은 쉽사리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마침내 바윗길이 끝나고 나무가 우거진 산길로 접어들었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들이 스스스, 소리를 내는데 문득 어떤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아니, 기억보다는 소리가 먼저.
 
플루트와 바람 소리. 갤러리에 잔잔하게 흐르던 인디언 로드. 뒤이어 어떤 눈동자가 떠오르고 다음엔 얼굴이, 표정이 차례로 떠올랐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바람 소리 사이로 플루트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까닭 모를 그리움이 가슴을 죄어왔다.
사진작가 고(故) 김영갑 선생. 제주도를 진정으로 사랑한 제주도 마니아.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내가 한 발짝 나아갈 때마다 사진으로만 만났던, 병마와 싸우느라 힘들어서일까, 지치고 공허한 선생의 눈이 나를 따라왔다. 아니, 한번 떠오른 영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의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작년 여름 다녀온 곳이다. 여러 차례 제주도를 드나들었지만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은 작년에야 알았다. 그것도 풍문으로만 얼핏 들은 터여서 큰 기대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넉넉하게 날짜를 잡고 떠난 여행길이 아니었다면 아마 선생과의 조우는 한참 뒤로 미뤄졌을 것이다.

 

두모악에서 내가 처음 맞닥뜨린 것은 돌을 쌓아 만든 정원과 선생의 작업실에 비치된 생전 모습이었다. 갤러리 안에 선생의 작업실이 마련돼 있었고, 선생은 작업실 의자에 기대앉아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선생과 눈이 마주쳤다.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싶었으나 웬일인지 몸이 굳어 말을 듣지 않았다.
 
몇 초쯤이 흘렀다. 그제야 나는 작업실의 사람이 진짜 사람이 아니라 의자에 앉은 선생의 사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선생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폭과 깊이가 얼마나 무한한지 나를 꿰뚫어보는 것 같았고 말없이 나를 질타하는 것 같았고 또 한편 측은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선생의 시선에 묶여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사진으로 만났어도 선생의 존재감은 그렇듯 묵직한 것이었다. 내가 간신히 그 시선에서 놓여날 수 있었던 것은 선생의 제자 되는 분이 가져온 커피 덕이었다.
 
천천히 전시실을 걸었다. 그때쯤 내 귀를 간질이는 것이 있었다. 바로 음악이었다. 플루트와 배경으로 깔린 바람 소리가 나를 에워쌌다. 음악이 있어 나는 한층 경건해질 수 있었고, 음악을 들으며 제주도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중에 물으니 인디언 로드라고 했다. 선생의 사진들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마치 한배에서 난 다른 자식 같았다.
 
전시실에는 다양한 제주도가 있었다. 오름과 바다, 억새, 구름, 들판, 해녀, 옛 마라도의 모습까지 만날 수 있었다. 이틀 전 마라도에 다녀온 터라 뜻밖의 장소에서 1980년대의 마라도를 만나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렇게 전시실을 거니는 동안 마음에서 악이 물러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악이 물러간 자리에 그리움 같기도 하고 쓸쓸함 같기도 한 감정이 자리 잡았다. 선생의 사진을 만나는 동안 나는 고독했다. 선생의 사진에 배인 고독이 내게로 전해져와 나까지 고독해졌다. 나는 얼른 정원으로 나왔다.
 
선생의 유해가 뿌려진 정원은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안개는 빠른 속도로 흘러가고 또 다가왔다. 안개가 살아 있는 생명체 같다는 느낌이 든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안개는 살아서 내 눈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정원 곳곳에 놓인 앙증맞은 조각상들을 구경하고 장독대도 들여다보고 미로 같은 돌담길을 걷기도 하면서 정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전혀 지루한 줄을 몰랐다.

 

오후에는 용눈이 오름으로 갔다. 제주도에서 20여 년 사진 작업을 하며 선생은 특히 오름에 애착을 가졌고 그중에서도 용눈이오름을 으뜸으로 사랑했다. 사진으로 만난 오름을 눈으로 보고 싶었다. 선생의 제자 되는 분이 안개 때문에 오늘은 오름을 보기 어려울 것이라 했다. 못 본다면 밟기라도 해야겠다. 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차가 없으면 힘들다는 말에는, 택시를 불러 가겠다고 했다.
 
나는 이번 제주도 여행에서는 차를 렌트하지 않았다. 배낭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며 걸었고, 걷기에 먼 거리는 시내버스를 탔다. 맨 앞자리에 앉아 있으면 기사 분들이 끊임없이 말을 걸어 다소 귀찮기도 했지만 렌트카를 타고 여행할 때와는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풍경도 사람도, 편하게 여행할 때와는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뭔가를 꾹꾹 다져 마음에 담는 듯한 느낌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제자 분이 정 가고 싶으면 자신이 안내하겠다고 했다. 택시를 탄다 해도 용눈이 오름을 찾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안개 때문에 오름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사양해도 소용없었다.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으로 차에 올랐다.
 
제자 분의 말이 맞았다. 산 중간으로 접어들수록 안개가 심해졌다. 10미터 앞도 보이지 않았다. 오름에 도착했을 때는 바로 앞에 선 사람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짙었다. 제자 분이 앞장서고 내가 뒤를 따랐다. 발밑만 내려다보며 허우적허우적 걸었다. 제자 분이 말했다.
 
“제주도 한두 번 와서는 오름을 봤다 할 수 없습니다.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각기 그 모습이 다르거든요. 오늘은 안개 낀 오름을 봤다고 생각하세요. 이런 모습 저런 모습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습니다. 다음에 오시면 또 맑은 날의 오름을 보시고.”
 
맞는 말이었다. 한편 그 말은 나를 위로하기 위한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를 위로할 필요는 없었다. 용눈이 오름의 전체상을 보지 못해도 전혀 실망스럽지 않았다. 안개 낀 오름도 나름 멋이 있었다. 나는 이미 몇 년이 걸리든 계절마다 오름을 보러 오리라 작정하고 있었다. 그러니 발밑만 보고 돌아간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다 얻을 수는 없는 법이다. 김영갑 선생도 좋은 사진 하나를 얻기 위해 무수히 이 길을 올랐을 것이고, 두세 시간을 기다렸어도 셔터 한번 누르지 못하고 돌아선 적도 있었을 것이다. 하물며 잠시 머물다 떠날 여행객인 나야 말해 무엇 하랴. 자연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만족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어도 정상이라 짐작되는 곳에 섰을 때 약간의 섭섭함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보이는 것은 온통 안개뿐이었다. 발밑의 풀뿐이었다. 조금 전 사진으로 만났던 그 유려한 곡선은, 하늘과 땅을 아우르는 광활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아직 속인이었다. 세상의 때를 벗은 사진을 한나절 보았다고 해서, 명상곡 한번 들었다고 해서 속인이 금방 초인이 될 리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섭섭함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여기까지 몸소 안내해준 제자 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오름을 내려왔다. 성산읍으로 나가 점심을 먹고 다시 두모악으로 갔다. 이미 하루의 일정은 어긋날 대로 어긋나 있었다. 조금이라도 만회하려면 점심 직후 떠나야 했지만 어쩐지 발길은 다시 두모악으로 향하고 있었다. 정원을 거닐며 느꼈던 평화를 다시 맛보고 싶었다.
 
오전에 보지 못했던 선생의 영상물을 보고 정원으로 나갔다. 그곳 정원수 아래 앉아 가져간 책을 읽었다. 나는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그곳이 어디든 한두 시간 눌러앉아 책을 읽는 버릇이 있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그곳을 떠날 때 아쉬움이 덜했다. 서서히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내가 두모악을 떠난 것은 해가 설핏 기울어갈 무렵이었다. 한잠 잘 자고 일어난 것처럼 마음이 개운했다. 발걸음 가벼웠다. 가뜩이나 터질 듯한 배낭에다 선생의 사진집과 에세이집까지 사서 넣었지만 하나도 무겁지 않았다.
 
정상으로 오르는 대신 대성암 쪽으로 길을 잡았다. 오른편으로 한강 상류가 흐르고 있었고 그 옆으로 구리로 넘어가는 길이 내려다보였다. 대성암으로 가는 길은 폭이 넓지 않아서 한 사람이 걷기에 족했다. 맞은편에서 등산객이 나타날 때마다 길옆으로 비켜서서 기다렸다.
대성암은 마음이 어지러울 때마다 종종 찾는 작은 암자다. 그게 아니더라도 산책 삼아 걷기에 좋았다. 20분쯤 걸었을까, 대성암에 미처 닿기도 전에 먼저 맑은 풍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손을 모아 합장배례 하고 절문으로 들어섰다. 향을 피워 꽂았다. 다시 합장배례 했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절에 오면 늘 그렇게 했다. 역시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가끔은 대웅전에 들어가 삼배를 하기도 했다. 삼배 뒤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다.
 
대성암 마당은 좁지만 눈앞이 탁 트여 있어 산도 강도 도시도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점점 바람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봄이라고는 했지만 3월 초순이라 아직은 겨울에 가까운 날씨였다. 움직이지 않고 서 있으니 뺨이 시려왔다. 옷 속으로 바람이 파고들어 오싹 소름이 돋고는 했다.
 
김영갑 선생은 아직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밥은 굶으면서도 필름을 사고 1년에 한 차례씩 전시회를 열었던 그분의 삶이 새삼 뜨겁게 다가왔다. 죽음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갤러리를 만들고 정원을 꾸민 그분의 열정이 목을 메이게 했다. 나는 잘 살고 있는가,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나는 산을, 강을, 도시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엉뚱한 곳에 한눈팔지 않도록, 세상의 욕망에 흔들리지 않도록, 끝까지 이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나 역시 선생처럼 가난한 무명 작가에 불과한 것이다.


 

Profile 소설가 구경미
1972년 경남 의령 출생, 경남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199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소설집으로 「노는 인간」이 있으며, 지난해 장편소설 「미안해, 벤자민」을 출간해 2008 동인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편집 후기
고 김영갑은 20년간 제주도만을 피사체로 삼은 사진작가다. 파노라마로 펼쳐진 그의 제주도 사진은 아름다움 그 이상의 것들을 느끼게 한다. “(그는) 풍경을 찍으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 바람을 그저 마음에 담으려 했다”는 한 사진 비평가의 말처럼, 그의 사진에는 흔들리는 듯한 피사체의 나부낌이 느껴진다. 김영갑의 작품이 더욱 애잔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의 평탄치 않은 삶 때문이기도 하다. 평생을 외롭고 쓸쓸하고 가난하게 살다 간 김영갑. 그는 사진이 절정에 닿을 무렵 루게릭병으로 서서히 죽어갔다.
소설가 구경미는 작가 김영갑을 통해 자신의 작가로서의 삶을 되돌아본다. 그리고 김영갑처럼 평생 흔들리지 않고 한 길을 가겠다고 다짐한다. 눈앞에 그려지는 아름다운 제주의 풍경과 김영갑의 애달픈 생애 그리고 작가의 내밀한 감정의 흐름이 잘 섞여 있는 에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