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에 한 사내가 웃고 있습니다.
지천명을 바라보고 있는 그는 사진쟁이입니다.
그의 사진에는 찰나의 시간과 억겁의 시간이 함께 머뭅니다.
바람에 이지러지는 유채꽃과 무꽃의 미세한 움직임, 그리고 돌담 사이로 비치는 붉게 물든 저녁 노을의

황홀함이 살아 숨쉽니다.
그 사진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바람의 움직임에 찬찬히 눈돌리게 하고 자연이 전하는 소리에 살며시

귀기울이도록 하는 묘한 힘을 지녔습니다.
한번이라도 그의 사진을 본 사람들은 그 사진의 매력에 흠뻑 빠져 말합니다.
그의 사진은 사진이 아니라 빛과 시간이 함께 빚어낸 그림이라고.

사진작가 김영갑씨(46). 20여년 전, 하늘길이 열리기도 전에 뱃길을 따라 제주도에 처음 들어왔습니다.

산과 바다, 오름과 들판이 함께 하는 제주의 풍광을, 굴곡진 제주 사람들의 삶을 담았습니다. 섬의

매력에 홀려 여러차례 드나들다 1985년, 아예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홀로 제주도로 옮겨왔습니다.

가족도, 친구도, 사랑하는 사람과도 모두 이별하고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색깔과 제주도에만

존재하는 선을 담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제는 비행장으로, 골프장으로, 관광지로 변해

버린 제주의 모습. 인간의 손이 닿기 전 아름다웠던 오름의 곡선이며 푸르렀던 그 색이 그의 사진 속에

오롯이 남아있습니다.

강렬한 색감을 내기 위해 작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필터도 쓰지 않고, 트리밍도 하지 않는 김씨의 사진

에는 기교란 한치도 없습니다. ‘삽시간의 황홀’ 작가는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그가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고, 그 상황이 오기를 수년간 기다려 찍은 하나하나의 사진은 ‘사진은 그저 셔터를 누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 생각해온 이들의 편견을 여지없이 깨버립니다. 그리고 그 사진 앞에서 바라보는 이는

참으로 작아집니다.

“홀로 사진을 찍고 작업을 하는 일을 수행이라 여겨왔습니다. 남이 인정하든 말든 사진을 즐겼고,

그랬기에 18년이라는 세월동안 내리 제주를 담을 수 있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와 고산자 김정호를 통해 고독과 소외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았다는 그는 끊임없이

자신과 대화하면서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여태껏 홀로 살아온 것도 무심(無心)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습니다. 밥먹을 돈을 아껴 필름과 인화지를 샀고, 작업을 하다 배가 고프면 들판에

자라는 무와 고구마로 허기를 달랬습니다.

가진 돈 탈탈 털어 준비한 개인전만 10여차례. 해외 전시회도 가졌지만 그에게 부귀도 영화도 가져다

주지 못했습니다.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사진을 함부로 다루고 마음대로 재단하는 출판계의 풍토

역시 참을 수 없었습니다. 지독한 가난을 면하기 위해 한번쯤은 자신의 작품을 팔 수도, 돈되는 사진도

찍었으련만 그는 옹고집을 부리며 끝내 작가로서의 자존심을 지켰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아니 찍지 못합니다. 대형 파노라마 카메라와 삼각대를 짊어

지고 걸어다닐 힘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벌써 1년도 더 된 일. 사진뿐 아닙니다. 마음 속으로는 허허

웃고 있지만 안면근육이 위축돼 어색한 미소만이 흐를 뿐입니다. 숟가락을 드는 일조차 힘에 부치고

소화기능도 부쩍 떨어졌습니다. 휴대전화를 받을 때는 꼭 한손으로 다른 손을 받쳐야 하고 키보드를

두드릴 기력도 없어 홈페이지(www.dumoak.co.kr)를 만들고서도 1년간 들어가보지 못했습니다.

병명은 ‘루게릭병’으로 더 잘 알려진 근위축성 측삭경화증(ALS). 운동신경을 다스리는 대뇌와 척수의

세포가 부분적으로 파괴돼 근육이 약해지는 질환으로 아직 정확한 병인도, 치료약도 밝혀지지 않은

병입니다. 몸이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3년 전. 사진을 찍을 때면 손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지난해 초 청천벽력같은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근육신경이 마비돼 점점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의사의 이야기. 길어야 3~5년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상보다 일찍 찾아온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1주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방안에서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서글프기도 하고 주르르 눈물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촬영해온 필름이며 인화지를 모두 불태워버릴까 생각도 했어요. 그동안 힘들게 작업한

필름을 발표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죽는다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일단 내 작업을 내가

마음먹은 대로 전시할 공간이라도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폐교를 임대해 갤러리로 고치고

있습니다”

한때는 전국의 용하다는 한의원을 찾아다니기도 했지만 이제는 담담하답니다. “휠체어를 타고 다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요. 조만간 장애인 등록을 하려고…”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씁쓸함

미소가 감돕니다. 그 미소의 한구석에는 생에 대한 강렬한 미련의 편린이 언뜻언뜻 내비칩니다.

“손바닥만한 창으로 내다본 세상은 마치 기적처럼 신비롭고 경이로웠어요. 휠체어를 타더라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방법이 연구된다면 다시 한번 카메라를 잡아보고 싶어요”

이땅에 사진이 들어온지 한 세기가 지났건만 아직도 제대로 된 예술장르로 대접받지 못하는 풍토를

보며 그는 참 할 말이 많습니다. 작가라는 이들은 그의 사진을 평가절하하고 가방끈이 짧다며 무시

했지만 그는 넓은 아량으로 이 땅의 사진사를 새로 쓰는 데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어 합니다.

작품을 전시할 사진전문 갤러리는 물론 작품을 발표할 고급 사진전문지도 드물고 작가층도 엷은

우리 사진계의 풍토를 그는 바꾸고 싶습니다.
그를 만나고 오던 날, 때마침 제주에 태풍 펑센이 불어닥쳤습니다. 비바람이 부는 갤러리 앞마당

바위에 뿌리를 내린 작은 들풀은 아무리 세찬 바람에도 꺾이지 않았습니다. 들풀을 바라보며 스물

두살에 루게릭병으로 진단을 받고도 왕성한 활동을 하며 올해 초 환갑을 맞은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를 떠올렸습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아픈 몸을 짐지우기 싫어 아직은 홀로 버티고 있는 김영갑씨. 그 역시 이 땅에 대한,

그리고 사진에 대한 질긴 애정이 있어 여리지만 강인한 들풀처럼 손쉽게 생의 끈을 놓아버리지는

않을 거라고, 기적같은 일이 그에게 일어날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취재수첩］“산간마을 폐교의 갤러리 제주를 옮겨놓을 거예요”－
서귀포에서 성산으로 가는 16번 국도를 따라가다 만나는 작은 마을 남제주군 성산읍 삼달리.

삼달리는 이렇다 할 만한 구경거리도, 구멍가게도 없는 작은 마을이다. 이 마을을 통과하다 보면

지금은 폐교가 된 삼달초등학교에 ‘김영갑 갤러리’가 자리잡고 있다. 작가는 무더기로 몰려오는

단체관광객 틈에 끼여서가 아니라 정말로 사진을 좋아하고 관광지로서의 제주가 아닌 제주의

참모습을 경험하기를 원하는 이들을 위해 일부러 전형적인 중산간마을에 갤러리를 만들었다.

스산한 폐교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흰색 페인트로 깔끔하게 마감한 건물은 어느 유명 건축가의

작품 못지않다. 한때 섬아이들이 뛰놀았을 운동장은 작은 제주도를 옮겨놓은 듯한 정원으로 변했다.

겹겹이 둘러친 흑갈색의 돌담은 에돌아서 갤러리로 향하고, 돌담 사이사이에는 오름도 봉긋 솟아있고

팽나무도 서 있다. 구멍 숭숭 뚫린 현무암에는 파초가 자라고 작은 꽃과 나무가 자란다. 방풍림

아래에는 김영갑씨가 손수 자연상태의 돌을 서로 붙여 사람의 형상을 만든 동자석 정원도 자리한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갤러리는 들에서 직접 사진을 찍지 못하는 그의 마지막 위안처. 뜻있는 지인들의

도움을 얻어 2년 전부터 준비해왔다. 건물 리노베이션 설계부터 정원에 심을 나무 하나, 돌 하나까지

본인이 직접 세심히 계획했다. “나를 반하게 한 제주도의 이미지를 담고 싶었습니다. 사진에는 담을

수 없는 제주도를 갤러리에 담고 싶었습니다”.

지금 전시중인 작품들은 그의 작품 10여만점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상설로 전시할

계획이지만 건강도 재정상태도 전과 같지 않아 걱정이다. 전시공간 맞은편은 아직 공사중인데

이곳에는 장르를 막론하고 제주도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할 계획이다.

 (064)784－9907

제주/윤민용기자 artemix@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