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빈 들녘의 바람결에 묻어난 존재의 의미 - 김현돈

텅빈 들녘의 바람결에 묻어난 존재의 의미

 

김현돈 (평론가)

 

 

카메라를 ‘사랑과 계시의 도구’로 정의한 안셀 애덤스는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찍는다는 것’은 다분히 수동적, 기계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만든다는 것’(poiesis)은 능동적, 창조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사진은 기계적인 행위를 통하여 객관적으로 세계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생, 인간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세계를 주체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인간이 사물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수동적인 감각현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과 지각의 능동적 작용을 뜻하며 이미 거기에 창조적 정신이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예술가의 창조적 주관성을 무시하고 기계적인 정확성으로 자연의 단편을 그려내려는 자연주의-오도된 객관주의-는 뭇사람들로 하여금 영혼의 떨림을 가져오는 진실한 감동의 체험을 할 수 없게 하다. 자연주의의 척도는 경험적 현실에 대한 외적 정확성에 있다. 문제는 ‘외적 정확성’이 아니라 ‘내적 진실성’의 여부에 있다. 자연의 즉물성에 탐하여 내적 진실성을 방기한다면 곤란하다. 사진의 진실은 카메라라는 기계적 수단만으로 재현되지 않는다. 사진은 반드시 대상을 향한 작가의 관심과 태도, 지각 등이 총체화됨으로써 비로서 진실한 표현에 다가서는 것이다.

내적 진실성은 작가가 현실에 능동적으로 개입하여 그 풍부한 현실의 소재를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창조적으로 걸러내어-개별의 사실을 예술적 감성으로 일반화하여-작품속에 형상화함으로써 표출된다. 이런 점에서 인상파 화가들의 오류는 명백하다. 자연주의의 대표 작가 에밀 졸라가 극찬했던 마네는 그의 평가대로 자연을 단편적으로 분석하는 능력은 뛰어났지만 그것을 예술적으로 종합하는 능력은 결핍되었다는 점이다.

결국 인물사진이거나 풍경사진이거나를 가릴 것 없이 그것은 작가의 자아가 투영된 자신의 초상이거나 자기 내면의 풍경화일 것이다. 그러한 사진을 통하여 우리는 각박한 일상사에서 잃어버린 자아를 발견하고 인생의 의미를 되새기며 주어진 삶을 풍요롭게 가꾸어 간다.

 

 

좋은 사진은 말을 하고 있는 사진이다. 인생에 대해서든 인간에 대해서든 사회에 대해서든 수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슬금슬금 그들만의 내밀한 과거의 추억을 들추어내고, 현재를 성찰하게 하고 또 미래를 내다보게 한다. 말이 없는 사진은 사실 죽은 사진이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에 관한 명상>(1980)에서 풍경사진은 그곳을 찾아가고 싶다는 것보다는 그곳에서 아기자기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환기시켜 주어야 한다고 했다. “미리 나를 유토피아적인 시간 속으로 인도해 주거나 과거를 회상시켜 주는 일종의 혜안을 갖게 해 줄 수 있는 곳” 그런 풍경의 본질은 마음속에 은밀하게 흔들림 없는 모성을 환기시켜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좋은 풍경사진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그 말을 통하여 삶에 대한 욕구를 자극하고 인간의 근원적인 회기본능을 일깨우는 강렬한 정서의 울림을 갖게 하는 사진이다.

화면 하단으로 검은 오름의 능선이 실루엣으로 낮게 깔려 있다. 상단엔 짙은 어둠이 먹물을 잔뜩 풀어놓은 것처럼 켜켜이 쏟아져 내려오는 데, 오름 너머 저 먼바다에 한 점 낙조가 명멸하는 등댓불 마냥 애잔하게 걸려 있다. 그 빛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시나브로 스러져가는 무심한 한 점의 빛은 살처럼 날아와 불현듯 지친 영혼에 낙인을 찍는다. 그것은 사진의 푼크툼(punctum) 즉 나를 자극하는 우연성이다.

 

 

또 한 장의 풍경사진을 보자. 땅거미는 지고 계절은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어디메쯤 와있는듯, 아스라한 오름 일몰의 청회색빛 구름장들 사이로 언뜻 언뜻 드러나는 엷은 미색의 하늘. 그 하늘을 배경으로 키대로 자란 억새가 바람결에 일제히 한 방향을 잡고 몸을 뉘인다. 심란한 우수, 까닭 모를 존재의 비애가 온 가슴에 북받친다. 어릴 적 고향의 들녘에서 일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다 지쳐 문득 바라다 본 서쪽 하늘의 풍경이 저랬을까. 어디에선가 오펜 바하의 로맨틱한 첼로 협주곡이 흐르는 듯하다.

김영갑의 풍경사진에는 제주도의 바람이 묻어 있다. 제주의 바람은 대체로 풍향과 풍속을 가늠할 길 없다. 때론 눅눅한 바람이 때론 까실한 바람이, 때론 대지를 뒤흔드는 광란의 바람이, 때론 마른하늘의 돌풍이, 때론 보드라운 해연풍이 시시 때때로 마음을 헤집는다. 그리고 때론 시야를 온통 가려버리는 안개비를 동반한 바람 속에서 사람들은 고립무원의 실존을, 정처 없는 아득한 절망과 허무를 느낀다. 목덜미를 휘감는 그럼 바람의 질감이 어느 정도 익숙해질 때, 바다를 건너온 뭍사람들은 차츰 섬사람이 되어간다.

술과 방랑으로 점철된 젊은 날의 한 때를 제주에서 살다간 시인 고은은 “남제주 앞 바다, 특히 서귀읍이나 중문 마을 일대의 바다는 곧잘 바람보다 물결이 더 무겁다. 물결이 보일정도면 바람은 제법 가슴을 흔드는 정도다. 감청색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보다 물결이 더 무겁다. 물결이 보일정도면 바람은 제법 가슴을 흔드는 정도다. 감청색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꼭 깃발이 펄럭이기에 알맞다. 여류화가 천경자처럼 수선스럽게 펄럭이는 기를 달아서 바다와 바람에 한 편의 경쾌한 듀피 풍경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화면에 꽉 찬 들판의 황무지에, 목초지에, 하이얀 무꽃, 감자꽃, 노오란 유채꽃 위에 물이랑처럼 번지는 관능의 바람이 예민한 감성의 끝자락을 건드린다.

제주에 오면 누구나 돌하르방과 함께 가장 흔하게 목격하는 낯익은 표어가 있다. 관광전세버스 옆구리마다 관공서 건물마다 씌여 있는 ‘아름다운 제주’. 제주는 과연 아름다운가. 360여 개의 오름과 청정한 바다와 황량한 들판이 어우러진 천혜의 아름다움이 제주엔 분명히 있다. 그런데 이 감각적 아름다움의 뒷켠에는 오랜 세월 동안 조정의 탐학과 외세의 노략질에 맞서 싸우며 거칠고 메마른 화산섬을 일구어 온 이 곳 제주 사람들의 통한의 아픔과 자주 항거의 정신이 풀 한 포기, 돌 하나에도 절절히 아로새겨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 척박한 고난의 섬은 돈 많은 육지 사람들의 부동산 추기장이 되었고 최근에는 지방 자치정부의 개발드라이브 정책에 따라 섬 전체가 성한 데 없이 망가지고 있다. 중산간 지역에 30개가 넘는 골프장을 건설해 골프 천국을 이루려 하고 있다. 가당찮은 일이다. 개발론자의 눈으로 볼 때, 자연은 곧 개발과 투기의 대상이며 매력적인 관광 상품의 대상이지 인간과 공존해야 할 생태 환경, 삶의 터전이 아니다. 파괴는 쉽사리 이루어지지만 근본적인 회복은 어려운 것이 엄연한 자연 생태계의 법칙이다. 개발의 부가가치는 소수인에게 점유되지만 잘 보존된 자연의 혜택은 만인이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김영갑의 카메라가 붙잡은 제주의 자연은 관광 개발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인간과 더불어 함께 해야 할 유기체적 삶의 공간으로서의 자연이다. 국토의 남단 마라도에서 한라산에서 바다에서 중산간 들녘에서 그는 오염되고 훼손되지 않은 야성의 자연을 본다. 이런 야성의 자연을 온전히 카메라에 담기 위해 그는 철저하게 환경 친화적인 삶을 실천하고 있다. 번잡한 저자거리를 피해 주거를 제주도 중산간 송당리 대천동에 옮기고 TV도 신문도 없이 외부 문명과 거의 격절된 삶을 살아간다. 손수 지은 허름한 옷을 입고 장발의 머리를 댕기로 질끈 묶은 채 무거운 카메라 장비를 둘러메고 종일토록 들짐승처럼 온 들녘을 헤매고 다닌다. 그러다가 마음을 끄는 그림이 나타나면 몇시간이고 며칠이고 그 자리에서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풀이파리 하나에도 섬세한 바람의 리듬감과 일광의 변화를 계산하며 끈질기게 기다린다. 오랜 기다림 끝에 “한라산의 황홀”은 “마치 기적처럼 삽시간에”붙잡힌다.

그의 풍경사진은 시정이 넘쳐나는 밀도 있는 구도와 다양한 색감의 변화, 그리고 빛과 그림자의 강한 콘트라스트가 매우 회화적인 감각을 표출하고 있다. 작가가 직접 개입하여 말하지 않고-작위성을 배제하고-사진 스스로가 말하게 함으로써 보는 이들의 미적 상상력에 호소한다. 인적없는 텅 빈 바다나 텅 빈 들녘의 바람결에 사람들은 싸하게 밀려드는 불가해한 존재의 향수와 바닥 모를 실존의 고독과 만날 것이다.

 

 

사진에서 직관력을 강조한 앙리 까르띠에 브레쏭의 ‘결정적 순간’이란 사진가의 의식과 전망이 통일되어 내용과 형식이 거기에 합치되는 순간을 일컫는다.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직관력은 늘 지성에 의해 길러지는 것으로 다른 예술과 부단히 접촉함으로써 풍부해진다고 그는 말한다. 불과 수십 분의 일초에서 수백분의 일초라는 ‘순간으로 승부하는’입장에서 직관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거기서 ‘본질’까지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신조다.

사진의 미학은 선택에서 판가름 난다. 비본질적인 것에서 본질적인 것을, 우연적인 것에서 필연적인 것을, 지속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한 순간을, 무한히 펼쳐진 공간 속에서 하나의 대상을 선택하고 절단하여 감광판 위에 고정시킨다. 여기서 모든 것은 결정된다. 사진가는 금방 사라지는 것 그리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찰나의 시공간과 싸운다. 여기에 사진의 매체적 독자성이 있다. 자연의 단편적인 사실 속에서 ‘참된 것’을 의미 있는 현실로 붙잡아내는 것이다. 자연에서 받은 황홀감(그것은 전율하는 아름다움이다!)은 “마치 기적처럼 삽시간에”붙잡힌다. 그 결정적인 한 순간을 위해 사진가는 영원을 산다.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갖고 인간과 사물을 보는 시각을 풍부히 함으로써 그러한 경험의 누적속에서 예술적 직관력은 갖추어진다. 감동적인 사진은 상투화된 자연주의적인 감각의 아름다움을 지양하여 인간 삶의 복잡성과 다층성을, 세계에 대한 긴장감을 화면에 압축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아름다운 제주 자연의 풍광, 그 바람결에 묻어난 존재의 의미에 포커스를 맞춘 김영갑의 심미안이 현실과 만나 표현의 영역을 확대하고 인간의 삶으로 걸어 들어가는, 더 큰 아름다움으로 승화해 나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