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속에 묻어 둔 여행지가 있다. 하루가 부대끼고 일상이 버거우면 문득 가고 싶은 곳이 있다. 거기에 가면 지친 어깨 펼 힘을 얻고 구부린 무릎 일으킬 기운을 얻을 수 있으리라. 막연한 기대가 부푸는 곳이 있다. 이때의 여행은 관광이 아니다. 되레 순례에 가깝다.

제주도 삼달리에 가면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이 있다. 폐교를 고쳐 지은 소담한 사진 갤러리다. 지금은 관광버스가 드나들 만큼 명소가 된 내 가슴속의 여행지다.

여기의 주인 김영갑(1957~2005)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제주의 평안한 수평 구도에 끌려 85년 섬에 들었다 4년 전 갤러리 앞마당 감나무 아래에 가루가 되어 묻힌 사람이다. 그는 이른바 루게릭병으로 죽었다. 온몸의 근육이 위축돼 마냥 말라가다 말 그대로 뼈와 가죽만 남았을 때 죽는 병이다.

제주에 있던 20년 동안 김영갑은 제주의 속살을 헤집고 다녔다. 섬에 홀리고 필름에 미쳐 간첩으로 몰리고 들판의 당근으로 허기를 때우며 제주의 풍광을 파노라마 필름에 부지런히 받아 적었다. 그가 유독 아꼈던, 하여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용눈이오름은 이제 제주 오름 트레킹의 대표 코스로 개발돼 있다.

김영갑은 4년 전 5월 29일 이른 아침 황망히 갔다. 전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유언도 없었다. 20만 롤이 넘는다는 필름을 어찌 해야 하는지, 갤러리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는 한마디도 남기지 않았다.

생전의 김영갑은 강퍅했고 고집불통이었다. 그럼에도(아니 그래서) 그를 아끼는 이들이 주위에 남아 있었다. 그가 그토록 구박했던 제자 박훈일(43)씨가 갤러리를 맡아 근근이 살림을 이어가고 있고, 후원회가 꾸려져 추모사업을 벌이고 있다. 다음 달 19일까지 서울 흥인동 충무갤러리에서 열리는 전시회 ‘지평선 너머의 꿈’은 김영갑 4주기에 맞춰 기획된 행사다. 미공개 작품 34점이 새로 공개됐다.

나에게 그는, 처절한 예술혼 따위로 남아 있지 않다. 외려 사소한 일상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생전의 그는 팔 올리는 일을 힘겨워 했다. 팔에 근육이 없어서였다. 파리와 모기를 끔찍이 싫어한 까닭이다. 파리가 눈앞에서 윙윙댈 때 모기가 콧등을 물고 달아날 때 그는 제 처지를 깨닫는다고 했다. 그 하찮은 파리·모기도 쫓아내지 못하는 자신이 싫다고 그는 울먹였다.

삶에 지칠 때마다 김영갑의 저 혹독했던 생을 생각한다. 그리고 내 일상이 얼마나 안일과 나태, 무위와 도식으로 범벅돼 있는지 돌아본다. 여행은 제 한심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하여 김영갑은, 내 가슴 깊숙이 묻어 둔 여행지다.

손민호 기자